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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허영자 - 씨앗 씨앗 -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 부드럽고 쓸모있는 것들이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고집세서 쓸데 없는 것들이 오래 남는다 쓸모없어 찾는 사람도 없는 외롭고 쓸쓸하게 방치되어버린 오직 꼭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남겨진 것 자신을 죽여야만 살릴 수 있는 것 죽기 전까지 고독하게, 쓸쓸하게 자신을 버림받도록 만든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고, 삭히지 못하고 저버러지 못하고, 내버리지 못하고 무엇 하나 썩도록 버려두지 못하고 온전하게 품어내야만 제 쓸모를 다하는 것 그것은 가장 나중까지 남아야만 알아 볼 수 있다 고독하게 오래도록 버림받은 당신의.. 더보기
권현형 -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 권현형 나환자 마을이었다가 전쟁으로 불타버려 다시 들어섰다는 마을, 당신이 사는 그곳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문득 당신이 붉은 꽃잎으로 보였지요 나병을 앓고 있는 젊은 사내로 슬픈 전설의 후예로 나무 잎새들 당신의 머리카락 햇결처럼 물이랑 일던 초여름이었지요 꽃잎, 작디 작은 채송화들이 마당 가득 재잘거리고 있던 그 집, 그 방, 당신 방에는 작은 악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아무도 한 번도 켜본 적 없다는 흰 벽 위에 벙어리 만돌린이 내걸려 있던 방 당신이 좋아한다는 여자의 편지를 읽어주던 내가 없던 다른 여자가 있던, 햇살이 엉켜 어지럽던 그 골방처럼 모든 내력은 슬프지요 켤 수 없으므로 아름다운 푸른 만돌린에 대한 기억처럼 * 일본의 게이샤들이 누군가의 소실이나 반려로 간택되어 .. 더보기
정윤천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먼 곳에 두고 왔어도 사랑이다.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제 혼자서 부르며 왔던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외로운 열망같은 기원이 또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쪽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이 세상을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만 같은 한 순간이여.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휩쓸려,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꺽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 더보기
마종기 - 우화의 강 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 더보기
황규관 - 우체국을 가며 우체국을 가며 - 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 더보기
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1 나는야 세컨드1 -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 더보기
이정록 - 도깨비 기둥 도깨비기둥 - 이정록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배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 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한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 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進軍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아빛, 그 솟구침, 그 얼음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얼어붙는다는 말이 뒷골목이나 군인들의 말인 줄만 알았지요. 불기둥만이 사랑인 줄 알았지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碎氷船을 처박은 자리,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더보기
이동호 - 비와 목탁 비와 목탁 - 이동호 무작정 때리다보면 지구라는 이 목탁도 언젠가는 텅텅 소리가 날 테지 빗방울이 땅에 떨어져 '철썩' 마지막으로 목탁 한번 치겠다는 것이 전혀 어불성설은 아니지 빗방울이 연습삼아 사람들 목 위의 목탁을 먼저 쳐보는 것은 지구를 쳐볼 기회가 단 한번 뿐이라서지 비 오는 장날을 걸어다니다가 머리 위, 비닐에 묵직하게 고인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본 적 있지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에서 '앗'하는 목탁소리가 터져 나오더군 빗방울이 때리면 뭐든지 목탁이 되고 마는 것 그게 삶, 아니겠어 소리를 내기 위해 물렁해지는 저 땅을 좀 봐 새싹이 목젖처럼 올라오는 것. 보여? 멍 자국이라는 듯 쑥쑥 키를 키우는 저것 소리의 씨앗인 빗방울 속에서 자라는 저 푸른 목탁소리 * 오늘 핀 꽃은 어제 핀 꽃이 아니다.. 더보기
박제영 -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 '시'란... '~란' 말로 시작되는 모든 말은 시가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시가 세상 만물의 조화에 참여하는 방법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한국어에선 대체로 '~란 ~이다.'의 형태로 표현된다. 시인은 "그리움이란~" 무엇무엇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말.. 더보기
황지우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비가 그친 새벽 산에 머물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산의 등허리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라가는 하얀 김... 산 중턱엔 하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산 아래로 내려온 나는 방금 전 선계에서 유배된 불쌍한 중생이다. 산이 하늘에 두고 온 섬이라면 나는 수중의 고혼이 된 셈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이 참 멋지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