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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마종기 - 우화의 강

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과 친하고 싶다

*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되는 일은 친한 사람이 많으면 많은 데로 적으면 적은 데로 신비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곁을 주었으나 곧바로 후회해본 경험이 나는 많았다. 친하다고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던 적도 많았다. 내 나이 서른살 이전까지는 내 동년배 친구들이던, 나보다 나이어린 이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했다. 이렇게 살지 마라, 저렇게 하지 마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내용이나 충실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를 밀도(密度)라 한다. 물리에서 밀도란 부피분의 질량을 의미한다.

나는 삶에 있어서의 밀도란 살아온 세월의 길이에 그 사람이 경험한 일들(독서경험을 포함해서)의 다양함을 통해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매우 밀도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했으므로 타인에게 충고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섣부르게 충고하지 않으며 충고한다고 해서 과거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상대방이 바뀔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으며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 하여 애닳아 하지 않는다. 뜨거웠던 피가 식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나이 서른에서 마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내 생각을, 내 피를 식게 만들 어떤 일들이 그토록 많이 벌어졌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그 사이 얼마나 겸손해졌는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니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더란 회한이 든다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한다.

사람도, 세상도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을 예전이라고 몰랐던 것은 아니나 이제는 그것을 과거처럼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뼈 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도 세상처럼 쉽게 바뀌지 않으며 세상도 사람처럼 쉽게 바뀌더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시인의 말처럼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란 사실을 알았고, 사람을 좋아하고, 좋아해주는 일조차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알았다. 나 하나 변치 않고, 내 고집대로 살아가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간 친하게 지낸 사람 하나 제대로 보살피며 살기도 어렵더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이 변하길 기대하기도 어렵지만 변하고 싶어하지 않는 나를 알기도 어렵다. 더더군다나 나는 여전히 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고집스럽게 지켜나가고자 하는 가치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희미해져가는 데도 나는 여전히 고집스럽다. 이제 나는 타인이 그런 나를 어여뻐 보아주기만 바랄 뿐이다. 누군가를 내가 억지로 참아주며 잘 지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억지로 나를 참아주며 내 곁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시원하고 고운 사람과 친하고 싶다."  

자기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지만, 자신의 맑음만 바라보지 않고 내가 진구렁에서 헤매길 자청하는 까닭도 함께 살펴주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까지 좋아해주지 않아도 그런 나를 먼발치에서나마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내놔라, 무엇을 기대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으로 흐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고, 내가 또 그 사람에게 친하고픈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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