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한국시

허수경 -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시를 읽다보면 또, 또, 또냐? 또 '사랑'이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개의 좋은 시는 서정시고, 서정시는 곧 연애시고, 연애시는 곧 '사랑'에 대한 시이다. 사랑을 많이 체험해야만 좋은 시를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좋은 시인이 되기 어렵다쯤 될 것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풍경은 사랑하는 동안이 아니라 사랑이 끝난 뒤다.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사랑이 어긋나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렇게 물을 이유가 없다. 무성생식에서 유성생식으로의 진화는 생물체의 종족본능을 위한 선택 중 한 가지였다. 그러나 순간 무수히 많은 통증이 우리에게 남겨졌다. 우리는 같은 존재였다가 이제 서로 다른 존재가 된다. 시인이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겠지만 저' 너른 우주의 밭'에서 지금 내가 아프다 한들 눈이라도 꿈쩍하겠는가?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라고 말한다. 한 편으로야 우주적인 시선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이제야 간신히 아프지 않게 되었다'는 고백일 뿐이다. 시적이든 예술적이든 '승화'란 그런 것이다. 아픔을 숨기거나 잊기 위한 간악한 술수...

'그저 나는 아프다. 나는 아프다. 나는 죽도록 아프다.'는 말만 되뇌일 수 없기에 하는 말일 뿐이다. 고맙긴 쥐뿔...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효 - 못  (0) 2011.05.02
김선태 - 조금새끼  (0) 2011.04.29
안현미 - 음악처럼, 비처럼  (0) 2011.04.28
서정주 - 대낮  (3) 2011.04.27
황동규 - 더딘 슬픔  (1) 2011.04.26
김경미 - 바람둥이를 위하여  (1) 2011.04.22
이병률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1) 2011.04.21
도종환 - 산경  (0) 2011.04.20
공광규 -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0) 2011.04.19
김선우 - 낙화, 첫사랑  (1) 2011.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