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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예술

임재천 - 한국의 재발견

한국의 재발견
- 임재천 (지은이) | 눈빛 | 2013-11-25







임재천의 사진집 "한국의 재발견"은 한국의 '재발견'이 아니라 한국의 '대발견'이다. 그것은 이 사진집의 첫 장만 넘겨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제일 첫머리에 등장하는 곳은 부산 영도인데, 순간적으로 나는 이곳에서 쿠바의 말레콘(Malecon)을 보았다.

1.
사진은 최초 탄생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몇 안되는 예술장르 중 하나다. 사진의 태초는 프랑스의 니에프스가 자연 풍경을 최초로 고정한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를 완성한 것이 1826년의 일이었다. 태초의 사진은 풍경이었다. 물론 태초의 사진이 풍경이 된 이유는 당시 기술력으로 상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8시간이라는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니에프스의 사진에는 8시간 동안에 해가 움직여서 해가 지나간 자리만 남고 실제 해는 나타나지 않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훗날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을 발명한 다게르가 촬영한 거리는 마치 핵전쟁 이후의 지구를 연상시키듯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 뒤 텅 빈 거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니에프스와 다게르가 남긴 최초의 '헬리오그라피'들이 사진이라는 한 예술의 범주가 감추고 있는 철학적 본질의 대부분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진을 의미하는 영어 'photography'란 단어는 잘 알려진 대로 라틴어 'phos(빛)+graphos(그리다)'의 합성어로 1839년 영국의 허셀(Herschell)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오늘날 사진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포토그래피(photography)란 말을 풀어보면 '빛으로 그리다'란 뜻이 되는데, 이 말은 자연으로서의 '빛'과 인위적인 행위로서의 '그리다'는 행위의 이항대립으로 구성된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풍경은 인물사진과 함께 사진의 가장 오래된 기본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의 역사는 170여 년 정도인데, 사진이 그만큼 젊은 예술 분야인 탓도 있지만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파된 시기를 헤아려보면 사실상 동양과 서양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초의 서구 문물이 등장할 때 그에 따른 번역어를 고민한다는 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 문물 혹은 제도를 어떤 것으로 생각했고, 고민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寫眞)'이란 말을 해체해 보면 동양적 사고 속에 사진이란 무엇이었는지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

'사(寫)'란 '베끼다, 옮겨놓다'라는 우리가 잘 아는 의미도 있지만 '떨어버리다, 덜어 없애다'란 뜻도 있다. '진(眞)'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참, 변하지 아니하다, 생긴 그대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진은 우리가 아는 대로 본래의 참된 모습을 생긴 그대로 베끼거나 옮겨놓는 기능도 있지만 다른 한 측면에서 보면 본래의 '모습(眞)'을 덜어 없애거나 떨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예술은 태생적으로 논쟁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사진처럼 그 자체로 예술인가 아니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같이 단순한 과학적 산물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사례는 없었다.





2.
1911년 이탈리아의 비평가이자 영화운동가 리치오토 카뉘도(Ricciotto Canudo)는 「제7예술론Club des Amis du 7e Art」을 통해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제1의 예술 연극
제2의 예술 회화
제3의 예술 무용
제4의 예술 건축
제5의 예술 문학
제6의 예술 음악
제7의 예술 영화
제8의 예술 사진
제9의 예술 만화

그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서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며 앞서 6가지 종류의 예술을 총화 시킨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화가 단지 ‘촬영되어진 연극’일 뿐이라는 편견"에 도전하기 위한 주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도 니에프스와 다게르에 의한 사진의 탄생(1826년~1838년)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한 영화의 탄생(1895년) 보다 앞서며, 기술적으로도 사진이 탄생한 뒤에 비로소 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영화에 뒤이어 제8의 예술이 된 이유는 사진이 걸어야 했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1862년 프랑스 파리 법원의 판결에 의해 비로소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발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프랑소아 아라고(Francois Jean Dominique Arago, 1786 ∼ 1853)는 “사진은 진보에 기여하고, 민주주의에 이바지하며, 누구나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사진을 예술로 받아들이도록 주장하기도 했다.

다시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 사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발터 벤야민이긴 하지만, 나는 좀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이란 담론으로 인해 사진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강화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란 오해에 대해 동양의 사유는 사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지만 동시에 본래의 '모습(眞)'을 덜어 없애거나 떨어버리는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담고 있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와는 사진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화가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다른 한 편으로 사진에 비해 유화가 지닌 예술성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초보자들은 희생시켜야 할 것을 희생시키는 중요한 기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했는데, 이런 주장의 저 편에 서 있는 당시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들은 '희생시켜야 할 것들을 희생시키지 못하는 초보적인 작품'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
디지털 기술이 사진의 물성(物性)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현대, 특히 풍경사진은 여전히 그런 오해를 받고 있으며, 나는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풍경은 여전히 천지(天地)이고, 풍경사진은 지천(至賤)이기 때문이다.

소박한 풍경의 기록으로 시작된 풍경사진은 처음엔 단순한 풍경의 기록이라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풍경을 좀 더 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창조의 욕구가 싹트면서 초기의 사진가들은 회화를 선진예술로 생각해 사진을 통해 이를 모방했다. 훗날 사진을 미술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조차 초기의 작품들은 회화를 모방하는 ‘예술사진(Pictorial photography)’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풍경사진은 장엄한 자연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만든 역사적 건축물, 마을의 정경, 일상적 풍경,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생활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를 담아내려는 풍토적 정경의 사진들, 또는 작가 자신의 주관적 내면세계를 반영시키는 작품에 이르는 등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근대화 이후 여가 생활의 증대를 반영해 유행하기 시작한 엽서사진과 관광 목적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지천이다. 심지어 안개가 한창 아름답게 피어날 이맘 때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 근방에 나가보면 마치 낚시꾼들이 포인트를 찾듯 좋은 사진의 포인트로 알려진 근방을 배회하는 사진가들로 득시글거린다.

그렇다면 임재천의 사진이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의 으젠느 앗제(Jean Eugene Auguest Atget)는 근대사진의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생전의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파리 시정의 일상적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한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본래 그는 초야에 묻혀 있었던 무명의 사진작가였다. 잘 알려진 대로 앗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만 레이(Man Ray)와 그의 조수로 일하던 버레니스 애보트(Berenice Abbott)였다. 앗제는 당시 만 레이의 이웃으로 몽파르나스에서 살고 있었는데, 1926년, 앗제가 죽기 직전 만 레이는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 기관지에 게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 애보트는 앗제의 사진이 지닌 가치를 알아차렸고,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앗제의 초상사진을 촬영했다. 앗제는 애보트가 초상사진을 촬영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애보트는 그때부터 앗제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해 이후 40년 동안 앗제의 포트폴리오와 아카이브를 만들어, 1981년 MoMA에서 그에 관한 전시회를 열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임재천의 사진을 앗제에 비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임재천의 사진이 지닌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임재천의 풍경사진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새롭지 않다. 그의 사진들은 기법적으로 보자면 미묘한 광선(光線)의 뉘앙스를 추구하는 한국 살롱사진(풍경사진)들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디 전통적이란 것은 낯익은 것, 낯익은 것은 진부한 것이고, 진부한 것들은 마음의 평정을 선사하긴 하지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마련이다.





4.
근대의 여행은 8시간 노동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가져다 준 여유를 이용해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이 일하던 곳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과거의 여행이 생(生)과 사(死)의 일대사(一大事) 인연(因緣)을 걸고 진리(經典)를 찾아 머나먼 천축(天竺)으로 떠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모험이었다면 근대 이후의 여행은 여흥(餘興)을 찾아 떠나는 것이 되었다. 여행의 필수품으로 관광가이드북이나 누군가 먼저 다녀온 사람의 여행기를 찾아 읽는 이유는 낯선 곳에서 낯설고 싶지 않다는 안정과 평온에 대한 추구이다. 에드워드 W. 사이드는 그와 같은 이유에서 여행을 하는 자들의 정서와 심리는 기본적으로 ‘텍스추얼(textual)'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낯선 장소, 낯선 시간을 찾아 떠나지만 그들의 마음과 감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언설화(言說化)된 지식과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결국 이들이 찾아간 곳은 낯선 시간과 공간이 아닌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굳건한 권위를 지닌,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직접 대면하게 될 진짜(real) 현실보다 현실화된 권위를 지닌 텍스트들, 다시 말해 굳어진 대상들뿐이다. 이것은 온갖 첨단문명으로 도배된 현실의 여행이 지닌 한계이자 오늘날의 풍경사진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사진의 탁월한 현실 묘사력은 ‘텍스트로서의 사진’이 지닌 텍스추얼한 권위를 더 한층 강화시켰고, 이후의 사진들은 과거의 사진들이 만들어 놓은 권위와 경쟁해야만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사진집이 아닌 사적인 계기로 인연을 맺은 최초의 사진가는 얼마 전 타계한 김영갑 선생이었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통해 당신과 인연을 맺었고, 당신이 사인해서 보내준 사진집을 받았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찍는 사진을 분명 풍경사진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에는 다큐멘터리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오늘의 이 풍경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자신이 가진 뛰어난 장점 중 하나인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기록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다른 사진, 이전의 사진들이 남긴 기록들과 투쟁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록이 가지고 있는 기록이라는 속성의 중요한 가치를 두고 ‘시간성’의 개념을 도입해 강화하고자 한다. 기록은 시간(세월)이란 긴 여행, 소멸을 염두에 두고 현재를 남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임재천의 사진을 높이 평가하는 지점들이 한 부분은 분명 거기에 있지만, 나는 그것에 의존해 임재천의 사진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1년에 한두 번 이상 역사기행의 명목으로 전국의 명승지를 살펴보는 일을 17년째 하고 있으며, 굳이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나의 닉네임이 ‘바람구두(windshoes)'란 것에 걸맞게 돌아다니는 일에 익숙하다. 그가 사진집에 담고 있는 곳들은 나도 대부분 다녀본 곳들이며, 나 역시 사진기를 손에 잡은 지도 어느덧 그만큼의 연륜이 쌓였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 그의 사진들이 담아내고 있는 풍경들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또 그만큼 그의 사진들은 나를 낯설게 한다. 낯익은 장소가 경이(景異)하게 보이기에 나는 그의 사진들이 경이(驚異)롭다.

그의 작업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풍경사진의 전통과 맥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앞으로 여기서 좀 더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땅에 대한 경험과 기억들을 ‘tabula rasa’의 상태로 몰아 부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보게 되는 것이다.





* 임재천은 계간 "황해문화" 2011년 여름호(통권71호)의 포토에세이를 장식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