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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예술

인고 발터 - 마르크 샤갈

마르크 샤갈 ㅣ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
인고 발터 지음, 최성욱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독일의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 Taschen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 중 한 권인 『마르크 샤갈』의 책날개에는 샤갈의 진면목을 살펴볼 만한 샤갈의 말이 있다. “선한 사람이 나쁜 예술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선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선한 사람이란 말은 나쁜 예술가란 말의 개념만큼이나 모호하지만, 선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은 더욱 모호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샤갈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가란 위대함보다는 선함이란 덕목을 갖춰야 하는 존재란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마르크 샤갈이란 이름에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지닌 몽환적인 이미지 못지않게 그 자신에게서도 몽상가의 이미지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샤갈의 작품에서 특정한 유파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으며, 샤갈 이후에도 샤갈처럼 그리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내게 그는 전무후무한 예술가다. 저자 인고 발터는 그를 “긴 생애 동안 주변인으로, 예술적인 기인으로 살았다. 샤갈은 다양한 세계를 연결하는 중개자였다, 유대인이었지만 우상을 금하는 관습을 당당히 무시했고, 러시아인이었지만 자기만족에 익숙한 나라를 뛰쳐나왔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지만 프랑스 미술계의 세련된 세계로 도약했다.”고 평한다.


러시아 지역을 포함한 중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지라 부르는데, 이들은 스페인계 유대인인 셰파르디와 더불어 유대인을 구성하는 최대 집단이다. 한때 이슬람이 지배했던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완료된 1492년 이후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포함한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있었던 것처럼 18세기 이후 20세기 초엽까지 동유럽(특히, 러시아)에서도 포그롬(pogrom)이라는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있었다. 마르크 샤갈은 이런 시대(1887년 7월 7일 출생)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성장한 유대계 러시아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아슈케나지의 공동체 언어였던 이디쉬어 보다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박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양친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는지 몰라도, 러시아와 유대계 혈통이란 이종교배의 덕분으로 그는 유대공동체 문화와 러시아 문화를 결합시킨 독특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리라.


인고 발터와 라이너 메츠거의 공저인 『마르크 샤갈』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균형 잡힌 미술 서적의 면모를 보인다. 작가의 생애를 중심으로 작품세계의 변모를 살피는데, 문자 텍스트와 도판을 적절하게 안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구성은 러시아에서 보낸 소년시절을 통해 샤갈이란 독특하고 모호한 세계관의 형성과정을 독자로 하여금 짐작해볼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러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통해 정교에 바탕을 둔 러시아의 민속/민중(folk)문화와 유대교적 전통이라는 모순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평화롭게 해결한다. 파리 생활을 통해 그는 유럽의 변방인에서 중심으로 진출하게 되고, 고향을 떠난 샤갈의 향수는 파리의 세련된 문화와 만나 한층 더 고양된다. 하지만 전쟁과 러시아 혁명은 파리의 이방인이자, 세계의 이방인이었던 샤갈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샤갈은 러시아 혁명의 초창기 동안 혁명을 지지하는 예술가의 일원으로 짧지만 혁명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성향은 정치와 예술을 병행할 수도, 예술을 종속시킬 수도 없었다.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에 위협받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파리를 떠나긴 했지만 전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파리 시민이란 위치에 안주했던 것은 아닌 듯싶다. 그가 즐겨 그렸던 “서커스단”은 샤갈의 영혼 속에 깃들어있을 모티프(motif)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샤갈 자신은 “내게 서커스는 마술적인 쇼다. 태어나고 다시 사라지는 세상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세상은 생기 넘치는 카니발의 소란스러움, 흥겨운 음악과 놀라운 마술, 기이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낯설음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서커스 무대에서는 세상의 법칙이나 규율은 간단히 무시되고, 그 어떤 신기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길 바랐다. 그는 그런 변화의 근원이 마음과 영혼에서 비롯된다고 믿었고, 마음과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만이 사회구조나 예술의 변화를 촉진하는 삶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의 박해와 유대민족을 구성하게 되는 거대한 에피소드인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그린 샤갈의 작품, 정중앙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커다랗게 묘사되고 있다. 십계를 들고 있는 모세와 수탉, 거꾸로 유영하는 사람들, 불타는 마을,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여인(마리아)과 염소. 샤갈의 「출애굽기」를 보면서 마치 불교미술의 만다라를 보는 듯한 마음이 든 것은 아마도 샤갈의 작품 세계가 이렇듯 절묘하게 모순이 균형을 이룬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