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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인문학

30분에 읽는 마르크스 - 질 핸즈 | 이근영 옮김 | 중앙M&B(2003)

30분에 읽는 마르크스 - 질 핸즈 | 이근영 옮김 | 중앙M&B(2003)


이런 류의 책들을 접할 때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엔 기대해도 괜찮다. 사실 이 시리즈의 제목은 맞지 않는다. "30분에 읽는 마르크스"라니 그게 가능하다면 누가 골머리를 앓겠나. 비록 이 시리즈가 150쪽 내외의 짤막한 반토막짜리 책일지라도 30분에 읽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필경 과장광고에 속하리라. 그보다는 이 책의 영어 원제명인 "Marx : A Beginner's Guide(마르크스: 초보자를 위한 입문서)"가 적합하다. 30분만에 읽는 건 불가능하지만 2-3시간 투자하면 간략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마르크스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므로 자꾸 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이긴 한데, 이런 책의 성패는 짧은 분량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우겨넣었는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책 한 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리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라 해도 세상의 모든 사상가들을 죄다 깊이있게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충고대로 그런 공부를 할 사람은 이런 책을 읽은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게다가 이 책은 다음에 뭘 읽으면 좋을지도 충실히 알려준다.

 

자, 다시 핵심으로 돌아와서 문제는 이 책의 저자가 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가 주장한 정치경제학의 이론들 가운데 핵심 개념들을 얼마나 잘 요약했는가, 그리고 충실하게 정리했는가가 관건이다. 그 부분에 한해서 나는 별 다섯을 주고 싶다. 게다가 이 책을 번역한 이근영의 "옮긴이의 글"도 아주 매력적이며, 이 책이 지닌 미덕에 그럴 듯하게 핵심을 잘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역사는 마르크스의 유산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은지 1백년도 안 되어 세계인구의 반은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는 국가들의 깃발 아래 살았었다. 최근의 우리 민족사도 마르크스주의와의 관련성 밖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예수 그리스도 이후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꼽는데 별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깊고 그 폭도 넓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본문 6쪽> 중에서

 

윗 부분이 요약본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칼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가 골치아픈 철학자이자 숫자라면 머리에 쥐가 날 경제학자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독일 낭만주의의 교양에, 헤겔 철학의 계승자란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읽어내기 난망한 사상가다. 그럼에도 이 짧은 책은 그에 대해 완전한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대한 이해의 첫 단계를 그럴듯하게 해치운다.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 끝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살짝 드러낸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칼리니코스는 "마르크스 사상의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지적 개입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단지 세계를 관찰할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그러했듯이 자신을 노동자계급의 삶과 투쟁 속에서 혁명 정당 건설이라는 실천적 과제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본문 9쪽>

 

이 책은 가이드북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에 매우 충실하게 짜여져 있는데, 이는 이 책의 저자 "질 핸즈"가 현재 성인교육전문가로 활동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성인교육이라 하면 먼저 성인방송, 성인전용콘텐츠를 떠올릴지 모르겠으나 영국의 학문적 전통 아래에서 성인교육이라 함은 문화주의 문화연구 그룹의 주요 구성원들이 성인교육전문가로 먼저 활동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칼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코드로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삶을 살핀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에 대해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을 개발했고, 이에 대해 책을 쓰고, 널리 알기 위해 애쓴 실천가였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라인주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매우 강했다.(오스트리아에서는 심지어 유대인은 장남만 정식으로 혼인할 수 있는 악명높은 반유대인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당시 태어난 많은 유대인들이 본의아니게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생아가 되고 말았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추진되면서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농업과 수공업에서 도시 산업 노동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농촌 지역 역시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고, 공동경작지를 빼앗고, 오랫동안 가난한 농부들에게 속해 있던 방목권 역시 박탈당했다. 결국 농촌 지역의 빈곤은 이들이 도시 지역의 값싼 노동력으로 흡수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자리를 얻어야만 했으므로 보건 시설이 전혀 없는 빈민가에서 살아야 했고, 안전장치도 없는 기계를 다뤄야 했다. 미성년자는 물론 아동들까지 노동에 나서야 했던 탓에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19세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시기에 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을 전공했고, 급진적인 사상을 제시한다. 그런 탓에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고, 프랑스, 벨기에,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9년 런던으로 이주한다. 그는 예니와의 사이에 7명의 아이를 두었지만 이들 가운데 3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30분에 읽는 마르크스"는 이렇듯 마르크스의 생애와 그의 사상, 이론의 주요 쟁점 및 마르크스가 지닌 의미의 현재성을 한 권의 책에 아우른다는 벅찬 주제에 감히 도전한다. 그리고 아쉬움이 없을리 없지만,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예를 들어 3장에서는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을 살펴보고 있다.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신이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당시의 주된 과학적 발전이 주로 수학과 역학 분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를 불변의 과학적 법칙을 따르는 고정된 것으로 파악했다. 이런 철학의 영향을 받아 당시 사람들에게 사회 속의 위치 역시 불변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개념 가운데 상당수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켰다. 그 가운데 특히 마르크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인류문명이 지적, 윤리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가 주장한 진보는 신성한 어떤 존재의 개입이 아닌 인간성에 내재된 합리적 정신(헤겔의 용어를 빌자면 "세계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진보(발전과 변화)는 변증법적인 긴장에 의한다고 보았는데, 서로 다른 두 개의 운동(관념)이 벌이는 갈등의 결과란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을 차용해 관념이 물질적인 경제활동으로부터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살고 일하는 환경이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엔 헤겔의 주장이나, 마르크스의 주장은 어찌보면 매우 상식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시로선 매우 놀랄 만한 급진적 사유였다. 세상(사회)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니...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은 "신"이나 "정신"이 아니라 "돈"이라고 주장한다. '돈은 인간 노동과 삶을 소외시키는 정수이며, 인간이 돈을 숭배하면 할수록 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기초로 어떻게 물질 세계가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한 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 이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멋진 것을 만들어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불행만을 만들어낸다. - K. 마르크스 『경제학-철학초고』

 

마르크스가 파악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돈, 자본, 상품에 대한 물신 숭배이다. 1) 돈에 대한 물신 숭배는 노동자들을 속이는 환상으로, 노동자들은 돈이 노동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게 된다. 2) 자본에 대한 물신 숭배는 자본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에게는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는 믿음을 말한다. 3) 상품에 대한 물신 숭배는 어떤 상품이 교환가치와는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다른 상품 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참조하시라).

 

인간 ‘소외’의 개념은 헤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이 주장하는 소외란 인간이 ‘세계정신’의 일부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보았다. 헤겔에게 있어 소외란 거의 종교적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이를 경제적 개념으로 규정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상품으로부터 이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상품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산물을 ‘자신들 외부에 있는 낯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공장시스템에 의해서 소외되고 비인간화된다. 공장시스템은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방법이고, 시스템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빼앗아간다.

 

소외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노동자들은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감추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탓에 자신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권리를 자본가들이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거나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과 연결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소비자들에게도 자기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욕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속인다고 보았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상품은 결국 노동자들도 노예로 만든다. 상품을 살 수 있는 돈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는 악순환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에 대한 물신숭배는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소비하도록 만든다. 사유재산제도 하에서 인간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만 그 물건이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사유재산, 임금노동, 잉여가치 그리고 시장의 힘 등은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들이나 그것은 너무나 교묘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조차도 소외되지만 최소한 그들은 “소외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물론 마르크스가 현재에도 여전히 유용한가?를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태반은 마르크스를 전혀 읽지 않은 이들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여전히 유용한가 묻기 보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먼저 하게 될 테니까.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바꿈으로써 사회자체도 바뀔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도 바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가 보여주듯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생각했던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