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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이면우 - 소나기 소나기 - 이면우 숲의 나무들 서서 목욕한다 일제히 어푸어푸 숨 내뿜으며 호수 쪽으로 가고 있다 누렁개와 레그혼, 둥근 지붕 아래 눈만 말똥말똥 아이가, 벌거벗은 아이가 추녀 끝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붉은 마당을 씽 한바퀴 돌고 깔깔깔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턴다 점심 먹고 남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와 나는 고추밭에서 쫓겨나 어둔 방안에서 쉰다 싸아하니 흙냄새 들이쉬며 가만히 쉰다 좋다. * 나이 먹고 제일 많이 달라진 게 있다면... 비 맞는 일이 줄었다는 거다. 비 오는 날... 나갈 일도 없고, 비가 와도 우산 없이 다닐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비 온다고 젖어들, 손바닥만한 맨 땅도 도시에선 구경하기 힘들다. 이제 비오면 맨먼저 비릿하게 달려들던 흙 냄새 대신 콘크리트 냄새와 열기가 먼저 후욱 .. 더보기
복효근 - 가마솥에 대한 성찰 가마솥에 대한 성찰 - 복효근 어디까지가 삶인지... 다 여문 참깨도 씹어보면 온통 비린내 뿐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할 날들은 남아 참깨는 기름집 가마솥에 들어가 죽어서 비로소 제 몸을 참깨로 증명하는구나 그렇듯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살과 피에서 향내가 날 때까지 어떻게 죽음까지를 삶으로 견디랴 세상의 가마솥에서 참 삶까지는 멀다 * 복효근 시인의 은 성찰(省察)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시이다. 비록 시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향적(polyphonic)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훌륭한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시인은 묻는다. "어디까지가 삶이냐?" 참깨라는 .. 더보기
기형도 - 비가2:붉은달 비가 2 ---- 붉은 달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 더보기
이성복 -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시인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럼에도 시는 .. 더보기
백석 - 고향(故鄕) 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의 이 시 "고향"은 그 자체로 참 따스하다. 하나의 에피소드, 하나의 국면만으로 구축된, 보기에 따라 참 단순한 시(미의 세계.. 더보기
문효치 - 공산성의 들꽃 공산성의 들꽃 - 문효치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거추장스런 이름에 갇히기 보다는 그냥 이렇게 맑은 바람 속에 잠시 머물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두꺼운 이름에 눌려 정말 내 모습이 일그러지기보다는 하늘의 한 모서리를 조금 차지하고 서 있다가 흙으로 바스라져 내가 섰던 그 자리 다시 하늘이 채워지면 거기 한 모금의 향기로 날아다닐 테니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한 송이 ‘자유’로 서 있고 싶을 뿐. * 올해(2011년) 제23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문효치 시인은 1943년생으로 9권의 시집 이외에도 몇 권의 기행집과 산문집을 상재해두고 있는 원로 시인이다. 글 쓰는 사람치고 방랑이든 여행이든 길 떠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만 문효치 시인은 별도의 여행에세이를 펴낼 만큼 여행을, 특히 .. 더보기
이상국 -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 이상국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창작과 비평사) * 숲에서... 어쩌면 구태여 미천골 숲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어쩌면 물푸레나무 숲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그런건 아무래도 좋으리라. 숲에서.... 산꼭대기까지 자란 나무들이 물 길어 올리느라 흠씬 젖은 새벽 이기고 지는 일이야 삼.. 더보기
정일근 - 묶인 개가 짖을 때 묶인 개가 짖을 때 - 정일근 묶인 개가 짖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그대, 은현리를 지날 때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움찔거리지도, 두려워 물러서지도 마라 묶여서 짖는 개를 바라보아라, 개는 그대 발자국 소리가 반가워 짖는 것이다 목줄에 묶여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세상의 작은 인기척에도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모른다 그 소리 구원의 손길 같아서 깜깜한 우물 끝으로 내려오는 두레박줄 같아서 온몸으로 자신의 신호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묶인 개는 짖는 것이다 젊은 한때 나도 묶여 산 적이 있다 그때 뚜벅뚜벅 찾아오는 구둣발 소리에 내가 질렀던 고함들은 적의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불빛 같은 신호였다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쓸쓸하여 굳어버린 그 눈 바라보아라 묶인 개의 눈알에 비치는 .. 더보기
김승희 -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 김승희,『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이상 듣기 싫다는 .. 더보기
반칠환 - 은행나무 부부 은행나무 부부 -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2004년 10월호) * 어느 시인들 아름답지 않으련만은 반칠환의 시는 아름답기 보다 어여쁘다. 아니 아직 덜 여문 어린 아이 잠지처럼 예쁘다. 사랑이 온통 뜨겁기만 한 것인 줄 알았더니 사랑이 저리도 따순 것이기도 한 것이구나 사랑이 저리도 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