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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어린이/청소년

안나 피엔버그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아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 사회복지와 연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배척의 원리는 자유롭게 사귀도록 내 버려둔다면 타락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 알란 튜링


영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안나 피엔버그(Anne Fienberg)"는 이 책을 통해 "남과 구분되는 한 아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세기 말엽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연대(solidarity)의식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한다. 그 결과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이름에 "XX연대"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걔중에는 연대란 말의 본디 의미도 모르는 체 그저 유행하는 데로 가져다 붙인 이름들도 많다. 이 책의 주인공 헥토르는 화산이 폭발할 때 '펑'하고 세상에 던져진 아이다. 당연하게도 이 아이에겐 부모가 없다. 헥토르는 상대가 징그러운 뱀, 무서운 사자라 할지라도 꼭 껴안아보고 싶어하지만, 외딴 숲 속에 사는 헥토르에게 친구라고는 도마뱀 민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인 김수영의 산문 가운데는 이런 논지의 이야기가 있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날 밤 자기 아이들이 어여뻐서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를 만져주었을 거다. 그러다 문득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을 게다. 그리고 스스로에게서 뱀 같이 차가운 소시민적 가족주의를 느껴 화들짝 놀라는 대목이 있다. 읽은 지 오래된 대목이라 정확한 내용을 언급하긴 어려워도, 난 김수영의 이런 반성, 성찰에 당시에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잠든 아이들의 이마를 짚어주던 시인이 어느날 밤 문득 들었을 상념이란 대개 아이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별처럼 느끼거나 신이 준 선물처럼 생각하는 게 고작 아니던가. 김수영이 그런 시인이었다면 그의 시는 보다 쉬웠을 것이고, 보다 많은 감성적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그가 그런 시인이었다면 최소한 나에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첫손에 꼽는 시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거다.

김수영의 그 놀라운 자의식이 나로 하여금 그를 최고의 시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 악마에게 유혹당하기 가장 쉬운 영혼을 지닌 이들은 고아 혹은 고아의식을 지닌 이들이다. 그렇기에 악마적인 상상력을 보이는 아니메 "에반게리온"에서 에바의 파일럿으로 양성되는 아이들은 죄다 고아로 채워진 게 아닐까. 내가 이런 말을 주저없이 하는 이유는 고아들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 고아였으니까, 만약 이것이 모욕이라면 내가 가장 먼저 당하는 것이다.

노르만 핀켈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은 원래 보통 명사이던 "홀로코스트(대학살)"이 어떻게 유대인 대학살만을 지칭하는 단어로 재탄생하게 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유대인만 학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자국 내에서 장애인들을 조직적으로 죽였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독일 내의 쓰레기(?)들을 처리하기 위해 "장애인.아동 안락사 계획"을 수립(1939년)하고 이들을 집단수용한 뒤 처리(?) 했다. 유대인 최종해결책이 나온 것은 1942년의 일이었다. 이들(장애를 가진)의 가족들은 모두 작은 종이상자에 담긴 유골가루와 정부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엔 고인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정부에 문의하지 말라는 게슈타포의 경고가 적혀 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누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서 걷는다. 그리고 잠시 후엔 뛰어다닌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아이들은 태어났을 땐 그저 연약하고 이름없는 살덩이에 불과하다. 불그스름한 피부에 머리가 몸통보다 큰 4등신의 육체에, 머리둘레는 평균 32cm, 신장은 50cm, 호흡은 1분에 40번, 맥박은 1분에 120번 정도인 이 작은 고깃덩이로 세상에 나온다. 원시시대 인류는 평균적으로 약 40%가 14세 미만으로 숨졌고, 3%만이 50대를 넘겼다고 한다. 학자들마다, 지역마다 추정치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원시 시대 인류의 부모들은 오래 살아봐야 대개 17-18세 미만이었다. 오늘날 영양 상태가 좋아져서 초등학교 4-5학년 무렵부터 첫 생리를 하는 여학생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런 영양 상태가 되지 못했을 테니 아무리 잘 보아주더라도 14-15세가 되어야 가임연령이 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14세에 첫임신을 하고, 10개월 뒤에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대개의 어머니들은 첫 아이를 16세 정도에 볼 것이다. 첫 아이의 수유 기간을 3개월로 보면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두 번째 돌을 맞을 무렵엔 이 세상에 없을 지도 모른다.

아이를 길러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인류의 아기가 2살 무렵 외부의 보호 없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0%다. 그렇다면 원시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아 현생 인류에 이어졌을까?
  
어느 폭풍이 몰아치던 날, 헥토르는 숲으로 밀려든 바닷물에 휘말려 민튼과 함께 바이킹의 나라에 도착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헥토르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라틴어로 이방인을 뜻하는 "hostis"가 '이방인'과 동시에 '적'을 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바이킹들이 헥토르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뭔가 피해만 입게 되면 이방인인 헥토르를 원망하고, 헥토르 때문이라고 탓한다.  오로지 질다만이 헥토르를 친구로서 인정해 준다. 사람들은 빨갛게 타오르는 헥토르의 머리를 보고 마을에서 발생하는 모든 우환을 헥토르 탓으로 돌린다. 단지 남이라는 이유로,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헥토르를 미워할 수 있는 수 많은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종종 인간 사회는 이렇듯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미워할 대상을 찾아 모두 공분함으로써 조직의 안전과 단합을 도모한다. 그것은 우리가 원숭이 시절부터 몸 안에 지니고 있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원숭이들은 자기 가족간의 결속력을 도모하기 위해 길을 잃고 자신들 영역 안으로 들어온 다른 무리의 원숭이를 가혹하게 대하여 결국 죽게 만든다.

안나 피엔버그의 이 동화의 결말은 매우 해피하다. 사람들은 헥토르의 단점이 곧 그만의 장점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자 이 책의 단점이다. 헥토르가 그 사람들,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역시 발상의 전환 덕인데, 그 발상의 전환이란 것이 자본주의적 유용성의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헥토르의 몸에서 나는 열은 연어를 데우고, 욕조를 덥히는 일에 쓸모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매우 중요한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최초인 1932년 5월 20일 대서양을 단독으로 횡단 비행했다. 물론 그보다 오래전인 1927년 찰스 린드버그는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했다. 물론 에어하트의 업적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에어하트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대서양 횡단비행 기록" 자체가 아니라 그녀를 "여성으로서는 최초"라며 그녀를 재발견해준 이들의 공로가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 타인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아니고, 구태여 유용한 능력, 가치의 재발견이 없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안나 피엔버그와 킴 갬블은 모두 호주인이다. 유럽인이 오기 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대륙이자 닫힌 섬이었다. 그 실례로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개(dog)란 짐승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곳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성화의 최종 봉송자였던 캐시 프리맨과 같이 애보리진 원주민들이 살던 곳이다. 그녀가 시드니 올림픽의 최종 성화주자로 선정된 까닭은 무엇보다 그네들의 원죄에 대한 사과와 화해라는 정치적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가해자이자 이주민인 백인이 피해자이자 대륙의 주인인 애보리진에게 화해의 손짓으로 용서를 구함으로써 인종간 대립을 해소하고 나아가 호주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 보려는 것이었다. 1770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를 영국령으로 선포하고 8년 뒤 1,500여명의 첫 이주민들이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이들 이주민 가운데 50% 이상이 범죄자들이었다. 이들이 이주한 뒤부터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은 단지 원주민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그들은 이들을 노예로 부릴 가치도 없을 만큼 원시적이라 생각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게다가 1910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전체 원주민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10만 명의  어린이들이 호주 정부의 격리 조치(문명화)에 따라 집에서 쫓겨나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이들은 1800년대부터 1969년 사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가족에게서 분리돼 정부운영 기관에서 키워지거나 백인가정에 양육되었다. 그들은 원주민과 원주민 자녀들에게 '백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다. 이것이 호주 정부의 정책이었다. 우리들은 이들을 가리켜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s)'라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이민가지 못해 안달나는 나라에서 행해진 조직적인 차별이자 인종말살정책이었다. 그것이 환경천국, 이민천국으로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숨길 수 없는 과거사이다. 결국 채 200년이 못되어 원주민은 39만명만 남았다.

호주의 백인들은 애보리진에게서 인간으로서의 가치, 아무런 효용성도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김수영이 그날 밤 했던 반성 - 자신의 소시민적 가족주의에 대한 - 의 내용은 내 자식만 이렇게 어여쁘다 하는 자신의 그 소시민적 근성에 대한 반성이었다. "에반게리온"에서 특무기관 "네르프(NERV)"가 고아들을 집단적으로 양육하며 에바의 파일럿으로 키웠던 이유는 이들의 영혼이 악마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는 에바의 파일럿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은 고아들의 외로움이 에바의 영혼과 싱크로(동조)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원시인류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첫번째 의문에 대해 답을 해보자.

인류의 기원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원시인류는 원숭이들과의 첫번째 생존경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안전한 숲속 생활에서 밀려나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류가 안전한 숲 속 생활에서 내몰린 나머지 나무에 매달리는데만 이용되던 앞발을 손으로서 이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손을 이용하기 위해 직립 보행을 하게 되었으나 인류는 아직 생존경쟁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원시적 생활 속에 인류는 병균과 천적들 때문에 불과 17-8세의 짧은 수명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던 까닭은 갓 두 돌이 된 아기들을 공동체가 공동으로 보살피며 키워냈기 때문이다. 사바나의 왕자로 군림하는 사자는 무리의 암사자를 놓고 경쟁하다 승리한 뒤엔 다른 숫사자의 새끼들은 모조리 물어죽인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들은 남의 아기라고 내치지 않고, 그들은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보호하고 양육하였다. 공공육아라는 고차원적인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실천하는 가운데 인류공동체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신영복 선생은 연대의 기본은 "하방연대"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연대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연대란 서로 동등한 존재끼리 맺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존재와 맺을 때 연대의 진정한 의미가 생겨나는 것을 뜻한다. 정상인은 비정상인과, 남성은 여성과,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고용주는 고용자와 한국인 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와 굳건한 연대를 맺을 때 비로소 연대의 진정한 의미는 완성되는 것이다. 종종 사회복지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가난은 국가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복지 예산 측정에 대해 낭비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종종 인류의 생활방식을 원시의 그것 혹은 야만의 적자생존으로 되돌리고 싶어한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인류가 오늘날까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그것,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용과 연대의 정신에 비롯되었다고 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인류의 것이 아니라, 사자들, 하이에나의 것이다. 만약 인류가 신자유주의자들의 그 충고에 따랐다면 우리는 숲에서 쫓겨난 그때 전멸했을 것이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는 '일탈'의 허용범위가 넓고, 그만큼 폭력적인 범죄의 비율이 낮다. 그러나 획일성이 강요되는 사회,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사회는 그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의 범위가 협소하고, 자신들과 조금만 다르면 폭력적으로 이를 교정하려 든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여기고, 이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며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식은 결국 폭력적인 해법을 불러들이게 된다.  일탈에 대해, 마이너리티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전체주의, 편견에 가득찬 협소한 정상(?)의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이 지닌 피부 색깔이나 선천적인 특성으로 인해 판단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지닌 인격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누구나 자신이 갖는 속성에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