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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이면우 - 소나기

소나기


- 이면우


숲의 나무들 서서 목욕한다 일제히
어푸어푸 숨 내뿜으며 호수 쪽으로 가고 있다
누렁개와 레그혼, 둥근 지붕 아래 눈만 말똥말똥
아이가, 벌거벗은 아이가
추녀 끝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붉은 마당을 씽 한바퀴 돌고 깔깔깔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턴다
점심 먹고 남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와
나는 고추밭에서 쫓겨나 어둔 방안에서 쉰다
싸아하니 흙냄새 들이쉬며 가만히 쉰다
좋다.


*


나이 먹고 제일 많이 달라진 게 있다면... 비 맞는 일이 줄었다는 거다. 비 오는 날... 나갈 일도 없고, 비가 와도 우산 없이 다닐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비 온다고 젖어들, 손바닥만한 맨 땅도 도시에선 구경하기 힘들다. 이제 비오면 맨먼저 비릿하게 달려들던 흙 냄새 대신 콘크리트 냄새와 열기가 먼저 후욱 하고 달려드는 도시의 삶. 태어나면서부터 도시인이었으나 나는 흙과 콘크리트의 경계에 섰던 변방인이었기에 양쪽의 냄새를 알고 있다. 


누렁이를 앞세워 논두렁을 달려본 기억과 학교 앞에 라면박스 안에 들어있던 레그혼 새끼들을 길러 본 경험이 함께 유년의 기억 속에 늘어서 있다. 태어나 한 번도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서본 경험이 없는 나는 산 속에서 비를 맞을 때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알고 보면 나도 식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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