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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이성복 -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시인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럼에도 시는 아직도 저렇게 푸르고 아프도록 시리게 빛난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1980년대 한국 시문학의 절정을 찍었던 시인 이성복의 시는 늪처럼 묵직하고 끈적거렸다. 그의 시에서 깨달음은 멀고도 먼 세월 저편의 일이었다. 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시인은 늪처럼 허우적대는 청춘의 무게를 질질 끌고 玉山에 올랐으리라.

그와 함께 玉山에 오른 것이 어디 개 한 마리뿐이었으랴. 비록 청춘의 무게는 그를 내리 눌렀을 테지만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에도 그의 웃음소리는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기만 했다. 이성복은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란 시에서 시적 묘사와 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분명 그 자신의 체험이었을 청춘의 연대기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은 이제 흘러가고 없지만 기억과 그리움은 여전히 그를 괴롭힐 것이다. 아니 그의 시와 함께 지난한 세월을 견뎌 간신히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에 도달한 우리들을 괴롭힐 것이다.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그 길을 찾자고 죽도록 헤매고 다녀야 했던 고통의 뻘밭을...

그럼에도 이처럼 환하게 빛났던 청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