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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나태주 - 지상에서의 며칠

지상에서의 며칠


-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 줌이었다가

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사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 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

사람들은 누구나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은 영원할 것처럼 군다.
시인은 "누군들 안 그러랴"고 말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세상은, 지상에서의 며칠은 눈깜짝할 새에 지나간다고.

사람들은 '삶은 열심히 살기엔 너무 짧고, 막 살기엔 너무 길다'고 말하지만,
나는 천만에 삶은 열심히 살기엔 너무 길고, 막 살아 버리기엔 또 너무 짧다고 말하련다.


열심히 살기만 하면 뭐해? 

삶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다고 막 살아버리면 또 뭐 해? 남는게 있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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