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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참여정치의 원칙을 위하여


참여정치의 원칙을 위하여

어제 저희 집에 오랜만에 장인장모님이 오셨습니다. 막내딸을 훔쳐간 도둑놈 사위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음, 정확히 말하자면 셋째 딸이죠. 흐)이 결혼 3년차를 향해가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중간점검차 방문하신 겁니다. 제 장인 어른은 오랜동안 교직생활을 해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회창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시죠. 제 장인 어른은 어렴풋이 제 성향을 짐작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피차간에 정치적 논쟁은 회피하고 있었습니다만 어제는 때가 때인 만치 정치 이야기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인 일인지 어제는 이 후보에 대해서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후보의 참모진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성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선거전략이 개판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엔 아무래도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상하시더군요.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약진할 것이라는 예상도 하셨습니다. 솔직히 좀 놀랬습니다. 그리고 이번 선거 결과가 어찌 나오든 민주노동당이 앞으로는 더욱 성장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걸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겠노라고 여러분에 공개했습니다. 그것을 결정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닥쳐올 결과에 대해서 한 사람의 시민이자 유권자로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저는 민주노동당의 당원이 아니고, 이번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특정정당의 당원이 될지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을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망명자 분들 중에서는 이미 게시판에 제가 올리는 글들에 대해서 어떤 오해를 하시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들은 제가 전략적으로 특정정당의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하였으므로 그에 대해 편파적인 글들을 올리고 있으리라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정당을 공개한 것은 제가 지닌 당파성을 여러분에게 공개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지난 몇 개월여의 기간 동안 이번 대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나름의 진지한 고민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선택했습니다. 심지어는 제 주변의 많은 이들과도 상이한 결론이었으므로 많이 힘들어야 했습니다. 제가 지지하는 후보를 공개했던 이유는 제 홈피를 통한 글들에 보다 합리적인 논거를 제시하고,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무현 후보가 여러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대통령 후보로 이번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기쁨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어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노무현 후보가 그런 고비들을 넘기고 대선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까닭은 그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거나 그의 정책이 제가 생각하고 원하는 정책에 가깝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했던 그를 지켜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 그 동안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의 벽 속에서 스스로 희망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있기에 노무현 후보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한반도에 드리워진 전쟁의 위기와 통일의 발걸음을 되돌리려는 세력을 막고자 스스로 떨치고 일어난 사람들에게서 저 역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위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저금통을 만들고 생활비의 일부분을 털어 후원하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노 후보의 당선을 기원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만에 하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경험한 2002년의 경험은 1987년의 경험처럼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령 노무현이 당선된 뒤 정몽준과의 정책 공조에서 보이는 것처럼 설령 우리의 기대와 희망을 좌절시킬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노무현의 맹목적인 추종세력이나 광신도가 아니므로 이에 대한 훌륭한 견제세력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그때에도 여전히 저의 희망으로 남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약진에도 똑같이 기쁨의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10% 이상의 지지율을 얻고, 노 후보 지지자들이 뿜어내는 열기를 본받은 당원들이 10만 아니 그 이상으로 불어나길 희망합니다. 제가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과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심한 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이 현실적이고, 그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가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이 보다 진보적이라거나 좌파적이라 제 구미에 맞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매달 꼬박꼬박 당비를 내고, 당의 주인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당원들이 있고, 패배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언젠가 이루어질 꿈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좀더 나은 세상,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루리라 믿고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 온 그들이 있기에 저는 그들의 꿈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지지율이 높아질수록 민주노동당은 앞으로 좀더 현실정치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보다 현실적이고 설득력있는 우리 사회의 대안들을 만들어 나가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랜 타성에 젖은 운동권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당이 아닌 일반 당원들, 시민들의 지지와 관심 속에 성장하는 경쟁력있는 민주노동당이 되길 희망합니다.

저는 이번 대선에서 나름의 지지를 결정하면서 두 후보 모두 진보라는 측면에서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노 후보 지지자나 권 후보 지지자 모두가 소중합니다. 이들이 참여정치의 물꼬를 터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누군가에게는 한 표를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혹시라도 여러분들 중 누군가가 제가 누군가를 지지하기 때문에 그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선택은 여러분 스스로가 진지한 고민 끝에 내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여러분이 지지하는 후보의 모든 면, 모든 정책, 모든 결정에 대해 전적이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누가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 것과 상관없이 어느 후보에게든 약점이 있으며 그가 이번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세운 정책 중에는 선심성 공약, 실현하기 어려운 공약들도 있게 마련이며, 앞으로 어느 당 후보가 당선 되더라도 집권 이후의 과정에서 실시하는 정책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거라는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극명한 한 판 승부라는 점에 매몰되어 서로에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노 후보 지지자나 권 후보 지지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지만 서로 비판하고 공격하더라도 결국 만나서 협력할 일이 있을 것이고, 가다보면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건강한 비판과 토론을 멈추지 말도록 합시다. 그것이 우리들 유권자 개개인을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대표팀 축구감독은 수입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수입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은 외국의 그럴듯한 이론을 수입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신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노선 투쟁으로 귀결될 일도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일들은 여러분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로는 조흥은행 매각결정, 공해상에서 북한 국적 선박 나포에 대한 견해, 공교육의 부실화를 막는 방법, 장애인의 투표 편의를 위한 배려 등등 무수히 많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여러분의 입장으로 결정됩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는 말은 아마도 그런 뜻일 겁니다. 우리는 막연한 지향이나 이론, 주의에 휩싸일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 주변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으로 정치적인 삶의 첫 단추를 꿰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번 대선에서 내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차원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참여정치는 이번 대선에서 나를 대표할 어떤 후보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선택한 후보가 혹은 그렇지 않은 후보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비판자로, 조력자로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올초만 하더라도 이회창 대세론은 피할 수 없는 현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지난 1990년대를 앞으로는 진보진영의 "잃어버린 10년"으로 기억하기보다는 변화와 개혁을 위한 에너지를 축적한 시기로 기억하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인간 노무현을 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인간 권영길을 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진보의 현장은 바로 여러분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IMF를 불러왔던 명문 대학 엘리트 출신의 학자들이나 과거 운동권 출신임을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정치인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여가 앞으로 이 땅의 진보를 움직여나갈 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노무현 후보를 믿지 않습니다. 노무현 후보와 함께 움직일 민주당의 정치인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만든 여러분을 믿습니다. 그를 믿고 지지해주고 떠받쳐준 여러분을 믿습니다. 그가 늘 말하는 대로 오로지 국민들에게 진 빚을 성심성의껏 되갚아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그로 하여금 그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되도록 비판하고, 압박해주길 바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는 진중권 씨가 당내 주사파 논쟁을 끝으로 탈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민주노동당의 타성에 젖은 모습, 관념적인 정책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토록 오랜 세월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얼음장 밑을 흐르는 한줄기 샘물처럼 싸워온 결과 8.1%의 지지율을 얻어낸 민주노동당의 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의 저력과 힘을 믿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가 걸어온 민주주의 길은 짧기만 하고, 우리들의 경험은 일천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우리들의 혈관을 가로막고 있던 고상한 정치에 대한 환상을 붕괴시키고 내가 지지하는 후보를 바로 내가 만들어 가는, 현실 정치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맘껏 비웃어주고 짓밟아주면서 정치는 내가 직접 한다는 자부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고 험난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지하는 후보가 누가되었든 그 모든 부분에 대해서 현실적이고, 이념적인 모든 잣대를 동원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검증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지한 후보에 대해서 더 이상의 검증과 절차가 필요 없다고 멈춰서는 순간, 여러분이 무비판적으로 그의 정책과 판단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이 지지했던 후보는 모든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모든 게임의 룰에 대해서 분노하십시오. 내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와 상관없이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당신의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당신의 소중한 한 표를 앞으로도 지켜나갈 유일한 수단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저는 언젠가 민주노동당이 더 이상의 견제권력이 아니라 권력이 되길 바랍니다. 물론 그것을 제가 살아 생전에 볼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제가 그 당의 당원이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민주노동당이 정권을 잡고, 권력이 되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진보를 위한 꿈을 꾸고 있을 겁니다.
<200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