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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현종 - 가객(歌客)

가객(歌客)

-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답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알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러자 아내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나는 무엇이든 좋으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글로 먹고 사니 되었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입을 삐죽이며 '치이'하고 웃었다.


風蕭蕭兮易水寒(풍소소혜역수한)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易水) 강물은 차가운데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부환)
장사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探虎穴兮入蛟宮(탐호혈혜입교궁)
호랑이 굴을 찾음이여 이무기 궁으로 들어가네
仰天噓氣成白虹(앙천허기성백홍)
하늘을 우러러 외치니 흰 무지개가 서도다!

어렸을 적 나는 자객이 되고 싶었다.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나는 형가(邢軻)는 내 삶의 이상이었다. 형가는 뿌리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제 나라를 잃고 흘러흘러 연나라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지음(知音) 고점리(高漸離)를 만났다. 결국 그는 천하대의를 위해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했던 자신을 알아준 인물 전광(田光), 떠돌이 신세였던 형가를 거두어주고 자신보다 훨씬 윗 연배였으나 망년지교(忘年之交)로 사귀어주었던 전광의 뜻을 위해 죽었다.

그러다 나이 먹어 철이 조금 들자 나는 형가보다 고점리에게 더 정이 갔다. 형가가 진왕의 목숨을 노릴 때만 해도 아직 연나라는 멸망하지 않았으나 고점리가 진시황의 목숨을 노릴 때는 이미 연나라는 멸망하고 없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태자 단은 처음엔 연나라 사람이 아닌 형가를 신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가의 친구들이었던 고점리와 전광(田光)은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인물로 명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전광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형가를 추천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광은 형가를 추천했으나 고점리는 형가를 만류했다. 천하의 운세가 진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결국 형가는 실패하고 연나라마저 멸망한다. 망국의 음악가였던 고점리는 음악마저 폐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고점리의 음악적 재질을 높이 평가해 그를 불러들여 궁중악사에 임명한다. 형가가 고점리의 지음이었다면 진시황 역시 고점리의 지음(知音)이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 하였으니 고점리가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찾아간 형가를 잊고 진시황에 충성을 다한다한들 고점리에게 무엇이 잘못된 선택이랴. 그러나 고점리는 벗이었던 형가를 위해 진시황을 암살하려 들었다가 실패하고 만다. 진시황은 고점리의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였으므로 그를 죽이는 대신 고점리의 두 눈을 뽑는다. 목숨만은 살려 자신의 곁에 두고 음악을 연주하도록 한다.

그러나 고점리는 두 눈이 먼 상태에서도 다시 한 번 진시황을 죽이려 한다. 악기인 축의 빈곳에 납덩이를 가득 채우고, 진시황이 술에 취해 신경이 무뎌진 순간 그에게 악기를 던져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고점리의 두 번째 암살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더이상 봐줄 수 없었던 진시황은 고점리를 죽였다. 진시황은 이후 두 번 다시 제후국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진나라가 춘추전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기초는 그 사람의 출신국가로 배제하지 않고 믿고 등용하였던 인사정책이었지만 고점리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진시황의 그릇된 인사정책으로 인해 결국 진나라는 망국 사람들을 등용치 않았고, 망국의 엘리트들은 진나라의 인사정책에 커다란 불만을 품게 되었다.

망국의 가객이었던 고점리는 과연 정말로 진시황을 죽이고 싶었을까? 나는 가끔 고점리가 부러 실패해주고, 결국 자신의 목숨으로 그 실패에 값하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형가를 대신한 고점리의 복수는 성공한 셈이다. 진시황의 잘못된 인사정책과 오만은 그의 사후 제국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고, 결국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하였으니... 


나는 자객이 되고 싶었다가 가객을 사랑하게 되었고, 논객으로 살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다. 정말로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마 아무 것도 아닌 세상의 나그네(客)는 아니었을까. 형가와 고점리, 그리고 진시황의 시대에나 어울렸던 쓸쓸한 피리 소리로 떠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