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란 무엇인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는 과연 무엇이고 누구인가? 작가 최인훈은 『회색인』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며 식민지 착취를 통한 서구 제국의 자본 축적 과정을 날카롭게 묘파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불공정한 경쟁과 적자생존을 원칙으로 하는 불평등한 경쟁 체제이며 기득권을 소유한 자에게는 축복을, 경쟁에서 탈락한 자, 상대적인 약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배제와 소외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온 과정은 이렇듯 소수 집단에 대한 배제와 소외라는 '내부 식민지'화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를 확산시켰고, 동시에 노동 소외, 여성 차별, 특정 지역 배제를 전략적으로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인적 구성으로는 다수에 속하는 노동자와 여성 그리고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나 호남 지역이 소수자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소수자 집단은 80년대 사회 변혁 운동을 통해 노동자 집단의 세력화, 여성의 지위 상승, 정권 교체를 통해 일정 정도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너리티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같은 한국의 노동자라 할지라도 숙련된 정규 직 내국인 노동자는 다시 미숙련, 비정규,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 대해 다수자 그룹의 포즈를 취한다. 자신이 획득하게 된 작은 기득권이나마 그들과 공유하지 않으려 하고, 이를 통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정상인이 장애인을, 중산층 여성이 빈곤 여성 가장을, 제도권 교육을 받은 이들이 탈학교생들을, 인문계 고교 출신이 실업계 고교 출신을 상대로 역시 다수자 그룹의 역할을 하려든다. 독일이나 중동 등지에 파견되었던 외국인 노동자로서 마이너리티의 경험만 있던 우리 사회에 어느새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우리들도 상대적인 다수자 집단의 기득권을 그들에게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아야 한다. 이와같이 우리 사회의 지배 구조는 현재 격렬한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이제 마이너리티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질 들뢰즈는 이와 관련하여 "주류는 수가 적어도 스스로를 다수라고 제시하며 그래야 안심하는 사람들이다. 주류는 또 현재의 지배세력에 참여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과 동조하려고 하거나 독자적인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피지배자로 남길 원하거나 혹은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을 고스란히 역전시켜 보면 문화판에서 말하는 '마이너리티'의 정의는 가능할 것 같다. '마이너리티는 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권력의 장악이나 지배 세력에 편입되기를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 세력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삶의 양태를 꿈꾸고 실천하며 기득권을 이용하여 남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마이너리티의 개념은 앞서 말한 수동적이고, 차별당하고, 배제 당하는 소수자 집단이 아닌 행동을 포함한 적극적인 개념의 마이너리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판에서 통용되는 긍정적인 의미와 달리 현실 속의 마이너리티는 고단하고 아픈 것이다. 들뢰즈의 말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경고하고 있는 바가 좀더 명확해 보인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혜택과 기득권을 가지고 스스로 주류라고 착각하지 말며, 한시라도 그 작은 권력을 통해 남을 지배하려 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 때를 풍미했던 '중산층 되기의 허구'와 같은 것이다. 마이너리티와 주류의 관계는 영구불변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당신도 마이너리티일 수 있고, 주류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좀더 탄력있는 사회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인정되고, 일탈의 허용 범위와 개인의 자유가 보다 광범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의 범주가 좁은 사회, 이를 교정하려는 폭력의 강도가 높은 사회는 결국 파시즘에 이르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주류와 비주류 사이를 오가는지 모른다. 마이너리티와 주류의 선택 그것은 당신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선택 속에서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 2001년 11월 <가톨릭대학교 학보> |
'LITERACY > WOR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산의 평화통일론과 ‘평화통일도시 인천’의 지향 - <인천발전연구원>(2008.9.8) (1) | 2011.01.28 |
---|---|
깃발 없는 자들의 고독한 촛불을 넘어 - <실천문학> 2008년 가을호(통권91호) (0) | 2011.01.27 |
‘죽임’이 아닌 ‘살림’의 정치 - <인천일보> (2008.09.01.) (0) | 2011.01.27 |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멍드는 문화 인프라 - <인천일보>(2008.07.21.) (0) | 2011.01.26 |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 - <녹색평론>(2005년 3~4월(통권 81호)) (0) | 2011.01.25 |
가진 자들만의 민주주의를 끝내야 한다 - <환경과생명>. 2008년 여름호(통권 56호) (0) | 2011.01.24 |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다리 놓을 교육은 뭘까 - <기전문화예술>, 2006년 9.10월호(통권 45호) (0) | 2011.01.20 |
초콜릿, 권력의 달콤한 유혹 - <창비어린이> 2004년 겨울호(통권 7호) (0) | 2011.01.17 |
배다리의 문화공간화를 둘러싼 제언 - 계간 <작가들>, 2008년 봄(24호) (0) | 2011.01.11 |
이명박 시대,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은 가능한가 - <민예총 신년토론회> (2008. 1.24) (0) | 2011.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