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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허연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출처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년

*

한 소년이 있다. 그는 나이를 먹었지만 “나는 나를 만들었다”고 선언할 만큼 아직 오만하다. 늙어서도 여전히 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어린 마음(稚)과 기세(氣)가 합쳐친 것이 치기다. 치(稚)란 한자는 단순히 어리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만(傲慢)하다는 뜻도 있다. 오만이란 단순히 거만하다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바로 뒤에 오는 '게으르다'는 뜻에도 함께 주목해야만 완성되는 말이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소년으로 남고 싶은 사내가 있다. 그는 거만한 것만이 아니라 게으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소년으로 남은 사람은 나쁘다. 아니,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게으르기에 치기를 부린다. 난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너희들 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믿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것을 말로만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쁜 이유는, 그가 나쁜 소년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나쁜 소년은 자라서 나쁜 어른이 된다. 여전히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서글프게도 우리는 그것을 쉽게 인정하거나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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