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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호승 - 마음의 똥

마음의 똥

- 정호승


내 어릴 때 소나무 서 있는 들판에서
아버지 같은 눈사람 하나 외롭게 서 있으면
눈사람 옆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돌아와 곤히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내가 눈 똥이 다 함박눈이 되어 눈부셨는데
이제는 아무 데도 똥 눌 들판이 없어
아버지처럼 외롭고 다정한 눈사람 하나 없어
내 마음의 똥 한 무더기 누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

아버지 없는 손자 녀석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제일 많이 했던 말 중

하나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일어나지”라는 말이었다.
혀를 끌끌 차며 쏟아내던 당신의 무거운 한숨이
이마에 솜털도 가시기 전에 내 어깨를 내리 눌렀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을 내 앞의 삶이 외롭고 쓸쓸할 것이라는 걸,
해가 뜨면 녹아 없어질 아버지 같은 눈사람이라도
살그머니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당신이 있었다면
내 마음속에 지금처럼 켜켜이 쌓아올린 마음의 똥 무더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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