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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인문학

사무라이 - 니토베 이나조 지음 | 양경미 옮김 | 생각의나무(2004)

『사무라이』 - 니토베 이나조 지음 | 양경미 옮김 |  생각의나무(2004)


왜구 혹은 사무라이

"사무라이", 본래 사무라이는 말은 귀족출신의 무사만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12세기부터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일본정치를 지배한 무사계급에 속한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 이후 사무라이 문화는 왕실문화와는 일정한 차이를 지닌 그들만의 절도를 지닌 문화로 형성되었는데,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선불교의 영향을 받아 다도 혹은 꽃꽂이와 같은 일본 고유의 예술을 탄생시키도 한다. 일본하면 저절로 벚꽃과 사무라이를 연상하게 되는 건, 단지 일본인들 스스로 "꽃 중의 꽃은 벚꽃이고, 사람 중의 사람은 사무라이"라고 말하기 때문은 아니다. 조선 시대 이래 "선비" 가 우리 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처럼 일본의 문화와 사무라이의 관계 역시 그런 존재다 되어 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일본과 우리의 오랜 관계를 반드시 떠올릴 필요는 없다. 도리어 그런 선입견이 "사무라이 - 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미 존재하는 양국 관계, 역사를 배제하는 것 또한 니토베 이나조의 "사무라이"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된다. 이렇듯 "사무라이"란 존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일본 문화의 한 측면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가 영국의 젠틀맨십, 서구 중세의 기사도 등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복잡한 것이다. 굳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양국의 관계를 살피지 않더라도, 그간 우리에게 일본의 문화는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음에도 우리에게 일본은 낯선 문화의 나라이자, 백안시하지 않을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의 무사는 "사무라이" 이전에 먼저 "왜구"로 다가온다. 고려말 이성계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남해안을 약탈하기 위해 침공한 일본 사무라이들과 전쟁에서 승전하면서 였고, 고려 최무선이 명성을 얻은 것 역시 일본의 함선들을 해상에서 격멸할 수 있는 화포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선에 이르면 우리는 민족사 최대의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될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 사무라이들의 전투력과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연상하게 된다. 그에 비해 서구에서 "사무라이"는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살필 수 있는 것처럼 서구에서는 이미 상실해버린 정신, 영국의 젠틀맨, 중세의 기사와 흡사한 존재 혹은 그 이상의 신비로운 자기 절제와 희생, 엄격한 예의범절, 명예를 중시하는 정신 세계를 갖춘 사회 지도 계급으로 비취진다. 그런 인식에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일본의 '부쉬도(무사도)'에 대해 혐오를 보내면서 동시에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런 인식을 부러워한다.



니토베 이나조,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무라이 - 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에서는 저자 "니토베 이나조"에 대한 설명이 너무 간소하게 기술되어 있어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니토베 이나조의 초상이 과거 일본의 5,000엔 권 지폐에 사용되었다는 건 그가 "후쿠자와 유키치" 못지 않게 중요 인물이란 걸 의미한다. 그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묻고 싶은 건 일본의 지폐에 사용된 위인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지폐에는 생 떽쥐페리(프랑스)를 비롯해 근현대의 인물이 사용되는 반면에 우리 지폐에는 어째서 근현대 인물이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이승만, 장면, 박정희를 지폐에 초상을 삽입해 사용한다면? 반대로 김구, 여운형, 조봉암을 지폐에 넣어 사용한다면? 문화계 인물로 서정주, 김동리 등을 사용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이들은 분명 우리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지폐에 넣어 사용한다면 "김구" 정도를 제외하고는 십중팔구 사회적 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 근현대사에 굴절이 많았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일본 지폐에 "도조 히데키"의 초상을 넣거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초상을 넣는다면 필경 주변 국가들은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빚어질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니토베 이나조의 초상이 지폐에 사용가능한 것은 이들이 그런 논란의 여지가 적은 인물이거나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사망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 "사무라이 - 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 역시 태평양 전쟁 이전에 저술된 것이다. 그렇다면 니토베 이나조를 살펴보자. 그는 1862년 8월 3일 일본 모리오카번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1933년 10월 15일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던 1933년 세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이때만해도 히틀러는 처칠, 루스벨트 등이 모두 칭찬하는 정치지도자였다)했고, 미국에서는 뉴딜 정책이, 일제 식민치하였던 조선에서는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이 책의 저자 "니토베 이나조"는 그런 시기에 세상을 등졌다. 그가 죽고 4년만인 1937년 일본은 오랜 계산 끝에 독일, 이탈리아 등과 함께 방공협정을 체결하며 소위 추축국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그 다음해인 1938년 조선에선 조선어 교육이 폐지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확산되었다. 이해 감옥에선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망하고,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니토베 이나조는 도쿄 영어학교를 거쳐 16세 때 기독교도가 되고, 이때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신학자이자 무교회주의, 평화주의자였던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그는 1884년에서 1891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삿포로 농학교에서 경제학 등을 가르친다. 병으로 교직을 사임한 뒤 요양을 겸한 유럽과 미국 여행 과정(1898-1901)에서 이 책 "사무라이 - 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을 저술한다.

 

니토베 이나조가 살았던 시대는 비록 러일전쟁, 조선강점 등 일본의 팽창이 가속화되던 시기이긴 했으나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여 일본이 본격적인 군국주의, 제국주의 길로 들어서기 전 잠시나마 사상의 자유를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시기에 타이완 총독부를 거쳐(이 점 역시 니토베 이나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타이완은 조선과 달리 일본의 점령과 지배를 근대화의 한 과정으로 긍정하는 편인데, 그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뒤 대륙에서 건너 온 국민당 지배를 사실상 식민지배보다 더욱 가혹한 것으로 느낀 탓이다. 그런 타이완의 분위기만을 경험한 니토베 이나조에게 사무라이는 군국주의의 상징이 될 수 없었다) 교토제대 법학부 교수, 도쿄제대의 전임교수가 되면서 최초로 식민정책 강좌를 담당한다.

 

1911년엔 최초의 미일간 교환교수로 미국의 6개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고, 1920년에서 26년까지 국제연맹의 사무차장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했다. 귀국 후 그는 제국학사원 회원, 귀족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1933년 캐나다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의 일본 대표부 위원장으로 참가했다가 급작스런 발병으로 그곳에서 숨진다. 그는 학자이자 교육자, 국제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신념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저술 목적에도 드러나듯 "현대 일본의 보편적 사상이나 습관" 등을 서구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이해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일본의 정신, 동양의 문화와 정신을 서양 문명의 일방적인 수입이 아닌 융화와 교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무라이 - 일본의 꽃, 그러나....

"사무라이 - 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을 통해 니토베 이나조는 열렬한 어조로 서구인들에게 일본의 무사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뻔한 오리엔탈리즘임을 알면서도 톰 크루즈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묘사하고 있는 일본의 사무라이들, 그들이 경험한 서구 문명과 일본 전통 사이에서의 갈등에 대해 나도 모르게 감정이 일부 이입(그들에게서 이미지만큼은 동학농민군이 연상) 되었던 것처럼 니토베 이나조의 이런 주장들이 전혀 일리가 없거나 궤변은 아니다. 우리의 선비 정신이 소중한 것이라면, 일본의 무사 정신 역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니토베 이나조의 저술은 때로 매우 놀랍다. 이 놀라움에는 1898년에서 1901년이란 시기에 일본의 지식인들이 도달한 서구문명, 교양에 대한 이해의 수준에서 비롯된다.

 

"나는 어떠한 전제정치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제정치와 봉건정치를 동일시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은 국가의 가장 큰 심부름꾼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에 대해 한 법학자가 "이것은 자유주의 발달과정에 있어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이다"라고 평한 건 적절한 해석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 도호쿠 지역 요네자와의 번주였던 우에스기 요잔도 이와 흡사하게 "국가 인민을 위한 군주는 있어도 군주를 위한 국가 인민은 없다"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그의 말로부터 봉건제가 완전히 무단 정치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 50쪽>

 

이 단락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서구의 계몽군주인 프리드리히 대왕을 끌어내고 뒤이어 일본의 우에스기 요잔을 끌어내 서양과 동양의 정신을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흡사한 무엇으로 만들어간다. 동시에 그는 전제정치에 대한 부정을 봉건정치에 대한 나름의 긍정을 끌어낸다. 이것은 니토베 이나조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전제정치를, 그것도 "어떠한 전제정치도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충격적일 수 있는 발언이다. 그가 이렇게 발언할 수 있는 배경에도 역시 '다이쇼 데모크라시'란 시대 배경이 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리우는 시기의 일본은 메이지 시대의 숨가쁜 부국강병책(실상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 시기는 서구 열강들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해체하고 일본이 서구에 대해서도 평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성장했던 시기이다. 이 당시 일본은 '극동의 헌병'이라고 불렸다.)에 의해 사회적 안정을 찾고, 자본주의도 어느 정도 정착하여 시민계급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짧은 시기 동안 일본의 정치가와 학자들, 시민 계급은 천황제와 민주주의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를 합리적으로 규정하고 조화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현인신(現人神)이라는 천황제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군국주의로 나가는 일본으로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이에 제동을 걸만한 시민계급도 존재하지 않았다.

 

앞서의 인용이 니토베 이나조가 서구와 일본의 보편적인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사례였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은 그가 강조하고 싶어했던 일본만의 특수성, 서구인들이 이해해주기 바라는 일본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고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무사도의 영향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무의식적, 또는 암묵적 영향이다. 일본인의 심성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그 관념에 호소하면 이유야 어쨌든 즉시 반응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과 동일한 외국의 도덕관념을 새로운 번역어로 표현할 경우와 옛 무사도의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할 경우, 효과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신앙의 길에서 멀리 벗어난 기독교인이 있었다. 목사의 그 어떤 충고도 그를 타락의 길에서 구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일찍이 주군에게 맹세했던 성실, 즉 충의에 호소하자 그는 신앙에 복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의'라는 그 한 마디가 미적지근하고 애매한 상태에 처해있던 그의 고귀한 감정을 부활시킨 것이다. 어느 대학에서 한 교수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한 무리의 과격한 청년들이 오래도록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총장의 간단한 두 가지 질문을 듣고 그들은 즉시 해산을 결정했다. 총장의 질문은 이러했다. "제군들이 비판하는 그 교수는 과연 가치있는 사람인가? 만일 그렇다면 제군들은 그를 존경하고 학교에 머무르게 해야 하네. 아니면 그는 나약한 사람인가? 만일 그렇다면 쓰러져 있는 사람을 깔아 뭉개는 건 남자다운 일이라 할 수 없지 않는가?" 그 교수의 부족한 학식이 소동의 발단이긴 했지만 그것은 총장이 제시한 도덕적인 문제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무사도에 의해 배양된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은 위대한 도덕적 혁신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 175 - 176쪽>

 

니토베 이나조의 이런 인식에 선뜻 동의할 수 있을까? 그는 과거 무사였다가 기독교도가 된 한 인물이 목사의 설득에는 별로 개심의 조짐이 없다고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과거 주군과의 충의에 변화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니토베 이나조는 이런 사례를 보고 반대로 제도와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근대화된 일본, 일본의 시민이 실제로 정신 깊은 곳은 여전히 과거 봉건 국가의 그런 정신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로 반문해 보았어야 할 일이다. 그는 다음의 사례로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빚어진 일을 들고 있다. 실력 없는 한 교수에 대한 총장의 발언은 문제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결국 궤변에 불과하다. 문제의 발단과 근본 원인은 실력없는 교수, 즉 자격 없는 자가 지위를 맡아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총장은 그가 나약한 사람, 약자라면 보호해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학생들에게 본질을 왜곡시켜 버렸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학생들이 그 총장의 말에 따라 사태를 종결짓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실제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것들
- 풍부한 교양과 지식,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비판 정신이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극우파들은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경제 불황과 불평등의 심화는 일본 사회 안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극우세력은 "국책에 위배되는 외래 사상"을 배격한다는 명분으로 좌파에 대해 린치를 가했다. 1934년 육군대신 아라키는 수상 사이토 마코토에게 "국책을 해치는 생각을 금하라. 파괴적 단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라. 국민 총동원을 위한 총단결을 한층 더 강화하라"는 건의를 했다. 그 이후 일본은 모든 '비일본적인'인 것들을 탄압했고, 사이토 수상은 비상시국이라는 명목 아래 국민의 자유를 탄압했다. 이듬해 일본 국회는 "천황과 국가는 일심동체이다. 황금의 꽃병처럼 완전무결한 이 국체(國體)는 3,000년의 빛나는 전통을 가진 것이다"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 1936년 2월 26일. 과격파 육군 장교와 그들을 따르는 1,400명의 병사들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들은 도쿄를 점거하고, 재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사살하고,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에게 47발의 총탄을 난사해 죽인다. 같은 육군 안에서도 온건파에 속했던 장군 와타나베 조타로를 찔러 죽인다. 이들은 곧이어 발표된 포고문을 통해 "우리 나라는 러시아, 중국, 영국, 미국 등과의 전쟁에 직전해 있다"고 선언한다. 반란군은 4일 동안 도쿄 시내를 점거하고 있었다. 천황은 이들 쿠데타군에게 가시 병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다. 이후 반란군들은 형식적인 재판 과정을 거쳐 거의 대부분이 군대로 복귀한다.

 

니토베 이나조의 "사무라이"는 일본의 문화, 일본의 정신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하나인 "사무라이"를 통해 일본 문화의 기저가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시켜 주는 좋은 책이다. 그는 동서양의 풍부한 사례들을 가다듬고, 밝혀 일본 정신을 서구의 지식인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했다. 그의 책에 서술하고 있는 것들을 거짓이나 곡학아세한 것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아직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니토베 이나조의 지식인됨을 비판하는데 별다른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와 같은 동향인 모리오카 출신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9월 밤의 불평"이란 시를 통해 "세계 지도 위 이웃의 조선 나라/ 검디 검도록/ 먹칠하여 가면서 가을 바람 듣는다"라고 노래하며 조선 강점을 비판한 것, 그와 돈독한 신의를 지녔던 우치무라 간조가 이에 대해 "일본은 영토를 넓힘으로써 영혼을 병들게 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했다.

 

니토베 이나조가 그토록 풍부한 지식과 교양을 통해 밝히고 싶어했던 일본의 정신 "사무라이"는 이후 "사무라이 솔져"가 되어 동아시아 전역을 그들의 군홧발 아래 두고, 남경대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 군위안부,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 등을 벌인다. 니토베 이나조가 일본인으로 일본의 정신을 서구에 알리고, 내외에 이를 주장하고 싶어한 마음이야 우리도 충심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는 지식인으로서 이런 정신이 지닌 위험성도 함께 알렸어야 한다. 그렇기에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양이나 지식 이전에 바로 비판 정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 이 책은 현재 생각의 나무에서 일본의 무사도란 제목으로 재출간되어 있다.